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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역사는 생명체의 역사였다"
칼 짐머 著, '기생충 제국' 발간

기생충은 다른 동물에 붙어 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벌레를 일컫는다. 힘써 일하지 않고 남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을 가리켜 '인간 기생충'이라고 한다. 기생충은 이래저래 고약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기생충은 사라졌는가. 일견 그런 것 같다. 초.중.고교에서 기생충을 '박멸'하기 위해 구충제를 받아먹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요새는 그런 광경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생충들은 단호히 고개를 흔든다. 자신들의 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경우에 따라 좋은 일도 하니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라고 애교를 떨기도 한다.

칼 짐머는 끈질긴 연구와 면밀한 관찰로 기생충의 역사를 더듬는다. 저서 '기생충 제국'(궁리刊)을 통해서다. 기생충을 빼놓고는 생명의 진화와 생식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짐머는 강조한다. 생태계의 엑스트라로만 여겨졌던 기생충을 일약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재조명하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수집함은 물론 아프리카의 수단, 자이르, 중남미의 코스타리카 등을 두루 찾아다녔다. 기생충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감염 환자를 만나고 관련 학자를 인터뷰했다. 그러면서 기생충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지구에 안착해 살아가는지를 흥미로운 글쓰기로 들려준다.

기생충과 숙주는 피와 살을 놓고 미묘한 경쟁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물고기 입속으로 들어가 혀를 먹어치운 뒤 자신이 혀 노릇을 대신 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무려 13억명의 몸 속에 기생하며 피부의 벽을 잘라낸 뒤 이 상처에 이빨을 박고 혈액을 빨아먹는 십이지장충 같은 놈도 있다. 촌충 같은 놈은 길이가 무려 18m나 된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기생벌은 잔혹한 얌체의 대명사다. 유충이 다 자라면 숙주인 배추벌레의 배를 뚫고 밖으로 나와 배추벌레가 깔고 앉은 잎사귀에 번데기를 잣는다. 잠에서 깨어난 배추벌레는 기생벌의 번데기 위에 그물을 짜서 보호막을 만들고 그 위에 몸을 말고 눕는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건드리면 물어뜯고 고약한 액체를 내뿜는다. 이를테면 경호원인 셈이다. 기생벌이 번데기에서 나온 뒤 배추벌레는 누운 채 죽어간다.

기생충과 숙주의 경쟁은 상호 진화를 돕는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둘은 각자 살기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진화를 거듭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얘기다. 처음에 기생충이 우월한 상태로 숙주를 파고들면, 숙주는 그 나름대로 유전자의 변형을 일으키며 대응한다는 것. 이런 물고 물리는 게임이 기생충과 숙주가 진화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렇듯 기생충은 본의와 전혀 관계없이 생태계를 다양하고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구실도 한다. 이런 시각은 최근 학자들 사이에 커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숙주보다 한 수 위인 기생충들은 생태학적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버티고 앉아 생태계에 필요한 파수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생충을 가볍게 여기기 쉽고, 학자들조차 그에 대해 뜻밖에 잘 모른다고 짐머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인간 기생충'이라는 말은 그저 나온 우스개일까. 저자는 인간이야말로 지구라는 숙주에 붙어 사는 기생충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신들의 목적에 맞춰 생명체의 생리를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했고, 화학비료를 만들어 농토를 뒤덮었다. 마치 말벌이 숙주인 애벌레의 생리를 다른 길로 접어들게 해 대부분의 먹이를 자신들의 필요에 맞춰 조절하듯이. 염두에 둘 것은 자제할 줄 모르는 기생충은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자신의 숙주마저 그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그러면서도 "우리가 기생충 같은 존재라는 데 대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다독거린 다음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존재해오던 유서 깊은 기생충 모임에 참여해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명체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기생충은 숙주를 너무 심하게 손상시키면 스스로 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진화를 통해 배웠다"면서 "우리 인간이 기생충으로서 더 성공하고 싶다면 훌륭한 선배인 그 대가들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이석인 옮김. 440쪽. 1만3천800원.


[인터넷중소병원]  기사입력 2004-08-18,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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