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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이헌영 (세영 정형외과 원장)
  2008-10-29 오전 11:17:00
이헌영 (세영 정형외과 원장)

A. 길 도(道)

세상에 널려있는 것이 길이다. 사람이나 동물들이 많이 다니다 만들어진 자연의 길, 인공적으로 사람, 차마, 동물들이 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인공의 길 등. 그러나 <나의 길> 하면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지는 느낌이다. 누가 도(道)를 닦는다고 하면 그 분과 그 말에 제법 무게를 실어 다시 바라본다.

길을 한문으로 길 道자를 쓰지만 나는 두 단어를 별개의 것으로 느껴왔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한글의 길은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Road)'이라고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한글 사전에는 길은 ’사람이 지켜 나아갈 도리(morality)‘라고 분명히 쓰여 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는 내가 걷는 길이 도리를 찾아간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최근 자가용을 버리고 보라매공원을 통해 출퇴근하면서 나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바로 도(道)라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 어떤 길을 따라 걷고 있느냐에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는 확신이 든다.
<길이 도(道)이다.>


연세대 의예과에 입학해서 나의 기억에 아직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강의가 있다. 그때 이공대학의 이길상 교수님(한글학자 이은상 선생님의 동생)이 수업 첫 시간에 “여러분들이 지금 서대문 전차 정류장에 서 있다고 생각합시다.

여기는 동대문에 갈 전차도 출발하고 남대문에 갈 전차도 출발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느 전차에 발을 올려놓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앞으로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지금 여러분은 의사의 길에 들어섰지만 의사의 길에도 수많은 갈림길이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의 발이 향하는 곳이 바로 여러분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 당시 서울에는 전차가 다닐 때엿다. 지금 아이들은 지하철은 알지만 지상 도로 중앙을 달리는 전차는 영화에서나 보았을 것이다. <나의 발끝이 나의 인생을 좌우한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틱 낫한 스님이 우리나라에 와서 설법한 것 중 중요한 것이 걷는 방법이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자연과 만나며 명상을 하는 것이었다. 바르게 길을 걷는 방법이 바로 도를 닦는 것이라는 말이다.

머리로 도를 찾아 헤매다 보면 자기 속에 머물러 있어 더욱 골치만 아프게 한다. 걸으면서 자연과 주위와 대화하다보면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된다. 머리는 맑아지고 몸은 가벼워진다. 그래서 나는 하루 만보 걷기를 꿩 머고 알 먹기의 건강법으로 환자들에게 설명을 해주곤 한다.

나이 들어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살자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걷는 출퇴근길이 바로 내가 도를 닦는 방법이고 나의 건강을 지키는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회갑을 지나 새삼스럽게 걸음마 연습인지 홀로서기인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점차 걷는 것에 재미를 붙여 자가용은 아내의 것이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길은 명상이고 만남이다.>


나는 낙동강변의 작은 산촌 내제리라는 곳에 살았다. 나의 첫 모교 낙서국민학교는 산길을 넘어 걸어서 약 10리가량 되는 낙서면 소제지인 방계리에 있었다. 물론 나는 유치원이라는 곳은 다녀보지 못했다. 등하교시 산을 넘어 다니며 진달래꽃도 따먹었다.

간혹 등하교 길에 먼지를 휘날리며 가솔린 냄새를 품으며 달리는 고물 트럭 뒤를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따라갔다. 가솔린 냄새를 맡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아니 도회지에 가보고 싶은 어떤 바람으로 차의 가솔린 냄새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시골을 떠나 도시의 차량 등 공해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 가솔린 냄새가 좋았다고 하면 도시의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은 맑은 공기를 마시고 운동을 위해 가능하면 차도를 피해 걸으려고 노력한다.
<어린 시절 시골 통학 길>


B. 나의 출퇴근 길

아침 5시 30분이면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아파트의 문을 나서면 바로 앞에 있는 헬스 센터와 공원으로 향하는 몇몇 이웃들과 마주친다.
보라매 병원 쪽에 있는 보라매공원 후문을 들어서면 공군 사관학교시절 세운 비상하는 매의 상이 나를 맞아준다.

나와 매는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연세대 교정에서도, 지금 내가 사는 보라매공원에서도 매의 동상이 나를 맞아주고 있다.
왼편에는 넓은 보라매공원 운동장이 펼쳐지고 오른편에는 우리 꽃을 주로 심어둔 화단으로 시작된다.

참나리, 둥글래, 종지나물, 조릿대, 쑥부쟁이, 비비추, 옥잠화, 원추리, 돌단풍, 벌개미취, 매 발톱, 맥문동 등등. 나이가 들수록 우리 꽃에 대해서는 향수(鄕愁) 같은 것이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

우리 꽃들을 감상하며 고향의 원두막과 어릴 때 내가 만든 화단을 회상해본다. 그리고 중학교 원예반에 있을 때와 동래 원예고등학교 가까이의 금정산 기슭의 언던 위의 멋있는 정원이 있던 우리 집도 그리워진다.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존경하는 우장춘 박사도 생각난다. <매와 우리 꽃>


발길을 오른쪽으로 꺾어 공원의 북단 길에 속하는 보라매 청소년 수련관의 뒷길에 접어들면 길옆 남쪽에는 감나무들이 줄을 서있었다. 북쪽 언덕에는 작은 대나무, 소나무, 개나리 숲이 있다. 아스팔트 길가에는 금잔화가 노랗게 피고 코스모스가 가을을 준비하며 하나둘 맑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 길을 수년 전 동생과 함께 걸은 적이 있다. 걸을 때 동생이 양손을 벌리며 심호흡을 하면서 말했다. “이 길은 좋은 기(氣)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다.” 나는 그곳을 통과할 때마다 그 말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저 감나무의 감들은 누가 따먹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우리 병원 옥상의 감도 쉽게 도둑을 맞는 판에 길에 방치된 감을 가만히 둘까? 그런데 올해 약 1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보라매공원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고 있다. 그 감나무들도 임시(?)로 옮겨 다른 곳에 심어 놓았고 그 길도 새로이 단장하기 위해 모두 파헤쳐져 있다.

나는 친구들에게 ‘나는 100억 원이 넘는 재산가’라고 자랑한다. 우리 집 옆에 멋있게 꾸며지고 있는 보라매공원이 우리 집 마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이용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래서 그 이용도에 따라 이용자의 재산은 한없이 불어난다. <자연은 이용하는 사람 주인>


보라매공원이 수년전에는 공군사관학교였다는 표시로 6․25대 활약했다는 폭격기 두 대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저 전투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전투를 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6․25를 시작할 때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낙동강 전투는 정말 치열했다고 기억된다. 전투기의 폭격소리는 매일 우리의 고막을 찢어놓았다. 낙동강변이나 우리 마을 뒷산에도 많은 군인들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전시된 두 대의 전투기에서 그때의 굉음이 들리는 것 같다.

공원이 새로이 단장됨에 따라 이 전투기들도 다른 대형 군용기들과 함께 공원 북단에 넓은 새 보금자리를 준비하고 있다. 후손의 능력에 따라 역사물이 우대를 받기도 하고 천대를 받기도 한다. <후손이 잘 산면>


테니스장과 주차장을 지나면 보라매공원 정문에서 들어오는 큰 길이 있고, 거기서 우측으로 돌면 기상청과 동작소방서, 그리고 동작 구민 스포츠센터가 나온다. 너무나 깨끗한 공공시설이다.

기상청 정문 옆에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 과학자 장영실의 동상이 서있다. 앞으로 나올 지폐에 장영실의 초상도 거론되고 있다고 다. 내가 의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장영실이나 허준 같은 분이 대우받는 시대가 좋은 시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몇 걸음 더 걸어가면 새로 생긴 수도여고와 사군자 마을이 나온다.

이 모든 건물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들어선 것이다. 내가 보라매 공원주위를 돌아다닐 때 발이 빠지기도 한 곳이다. 수도여고 앞거리에는 메타세코야 가로수가 서있다. 최근에는 메타세코야가 가로수로 많이 심어지고 있다.

약 25년 전 지금의 인천국제C.C. 즉 옛 인천 씨 사이드 C.C.에 열심히 다녔다. 그때 골프장에 처음 메타세코야가 심어졌을 때 외국 수종이라 신기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우리나라 도처에 퍼져있다. 곧게 크고 품위가 있는 편이다. <장영실과 허준>


조금 더 걸어가면 보라매공원 서편에 남부 수도사업소가 있고 그 마당에는 보라매공원 산책객들을 위해 식수대가 있다. 작년에는 물을 냉동시켰는지 너무 시원해 과연 수도사업소답다고 무척 고마워했는데 올해는 미지근한 것이 맛이 없다.

용두사미(龍頭蛇尾) 그 앞쪽에는 무단 점거한 철거민 주택이 수년간 방치되어 왔는데, 지루한 철거 공방전 끝에 작년에 <파밀리에>라는 신동아 아파트가 들어섰다. 처음에는 나의 산책로를 막아버렸다고 화를 내었는데 아프트 주위로 순환 산책로가 새로 만들어졌다. 보라매공원 서편에 있는 야산에 아주 좋은 산책로가 생긴 것이다.

나는 나의 아침 산보코스에 이 야산의 순환 산책로를 추가했다. 산으로 올라가자 매미들이 요란하게 울어댄다. 서울 도심에서 이렇게 요란한 매미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풍년이 오려나보다, 그런데 최근의 어느 보고를 듣고 나의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밤낮없이 휘황찬란한 조면의 불빛 때문에 매미들이 잠을 못자 밤낮없이 울어댄다는 것이다. <매미는 언제 울어야 하는가?>


야산의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있는 배드민턴 운동장을 비롯하여 산책로를 따라 많은 운동 시설들이 마련되어 있다. 형형색색(形形色色)의 건강한 사람들을 바라보면 나도 절로 건강해지는 것 같다.

산길을 돌아 다시 보라매공원 쪽으로 내려오면 산 중턱에 보라매 법당이 있다. 보라매공원의 연못과 전 보라매공원을 내려다보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보라매공원의 연못은 최근 말끔히 단장하여 음악 분수도 만들었다.

그러나 옛날의 자연미나 새들의 노랫소리는 예전처럼 들리지 않는다. 각종 건강 체조를 하는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기합을 넣는 소리가 요란하고 아침 조깅하는 행렬은 활기를 준다. 테니스, 에어로빅, 태극권, 중국의 파룬궁, 도가 양생장수 술, 등등.
<운동이 제일 좋은 보약이다.>


보라매공원의 서남쪽 문을 나서면 신대방역을 향한다. 거리가 새로 단장되어 ‘깨끗한 골목길’이라는 현수막이 나붙었다. 그곳에는 문성 초등학교가 새로 지어져 주위가 한결 밝아졌다.

수년전만 해도 이 길은 음침하여 살인사건도 벌어졌던 곳이다. 항상 다니던 길이 점차 좋게 변모하는 것을 보면 무척 즐겁다. 옆에 흐르는 도림천도 청계천의 변신처럼 멋있게 바뀌기를 꿈꾸어 본다.

청계천은 인공천이지만 도림천은 관악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수 있어 청계천보다 개선되기에 훨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도림천이 청계천을 꿈꾼다.’

내가 하루에 두 번씩 기도하며 중얼거리니 하나님도 내가 불쌍해서 그 꿈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 ‘깨끗한 골목길’은 수년 내에 ‘산보하기 즐거운 도림천변 뚝방 길’로 명명되었으면 좋겠다. <도림천이 청계천을 꿈꾼다.>


신대방 전철역을 지나 도림천 주위의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전철역위의 육교 위에 올라서면 저 멀리 연주암이 보이는 관악산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보라매공원을 건너 동쪽을 바라보면 내가 방금 떠나온 보라매타운이 여명에 뫼 산(山)자를 그리며 높이 솟아 있고 발아래로는 전철과 자동차 행렬들이 힘차게 교차하고 저 밑으로는 도림천이 흐른다.

마치 우리 몸의 동․정맥피가 힘차게 흐르고, 림프액도 고요히 흐르고 신경계통이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며 사람, 지구, 우주는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의 물도 70% 우리 몸의 물도 70%. 그래서 인체는 소우주라고 한 모양이다. 자연과 함께 나도 걸어가고 물과 함께 나도 흘러간다.

어제 저녁 우즈베키스탄과의 올림픽 최종 예선전에서 자살골, 동점골, 역전골로 이어지는 채 2시간도 못되는 시간속의 게임 속에서도 우리는 삶의 길을 발견한다.

오늘 별로 특별한 생각을 한 것도 없이 단지 걸어서 병원에 도착 하였는데 출근길에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사람, 지구, 우주의 길은 하나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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